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먼저 말한 숫자
심사역이 화면을 반으로 나눈다. 왼쪽에 여섯 달 전에 받은 덱, 오른쪽에 오늘 받은 덱. 성장률을 보려는 게 아니다. 그때 하겠다고 한 것들이 지금 어떻게 됐는지 하나씩 맞춰본다.
그 결과로 정하는 건 하나다. 이 사람 말을 앞으로 얼마나 깎아 들을 것인가. 한번 정하면 그다음 말은 전부 거기에 맞춰 듣는다.
말은 70점인데 행동이 90점인 대표가 있다. 발표는 서툴러도 하겠다고 한 건 늘 그 이상 해낸다. 이런 사람이 뭘 말하면 듣는 쪽이 알아서 올려 잡는다. 반대로 발표는 흠잡을 데 없는데 지난번에 하겠다던 것 중 절반이 안 된 대표가 있다.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 듣는 쪽은 20점을 뺀다. 두 사람의 평균은 같다. 그런데 대접이 다르다.
지난 라운드에 다음 달 계약된다던 고객사가 넉 달째 감감무소식이라고 하자. 다음 미팅에서 값이 떨어지는 건 그 고객사 슬라이드가 아니다. 시장 규모도, 채용 계획도, 리텐션까지 같이 깎인다. 덱에 있는 숫자는 대부분 당신이 직접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.
깎이는 폭을 정하는 건 못 지킨 크기가 아니라 그 크기가 매번 비슷한가다. 투자자가 피하는 창업자는 계획을 못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, 이번엔 얼마나 못 지킬지 짐작이 안 되는 사람이다. 앞의 사람은 밸류에이션을 조정해서 사면 되고, 뒤의 사람은 살 수가 없다.
그래서 "보수적으로 잡았습니다"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. 얼마나 틀리는지도 왜 틀리는지도 없어서, 미리 밝히는 게 아니라 봐달라는 말이 된다.
수술 전에 의사가 말한다. 이 수술은 스무 명 중 한 명꼴로 합병증이 옵니다. 그리고 합병증이 왔다. 환자는 그 의사를 의심하지 않는다. 아무 말 없이 수술하고 합병증이 온 뒤에 같은 말을 했다면, 환자는 그 의사의 다음 말을 하나도 믿지 않는다.
확률은 똑같다. 먼저 말하면 미리 알고 있었다는 뜻이라 실력이 되고, 나중에 말하면 변명이 된다.
창업자에게 수술 전 설명은 이런 말이다. "저희 계획은 지난 세 분기 동안 평균 한 분기씩 밀렸습니다. 이번에도 그만큼 늦어질 수 있습니다. 원인은 대기업 고객 쪽 결재 속도입니다."
대표가 먼저 꺼내면 심사역은 이 사람이 회사를 안다고 본다. 실사에서 먼저 찾아내면, 대표는 몰랐거나 숨긴 사람이 된다.
말을 줄이라는 얘기가 아니다. 90점짜리 말이 문제였던 적은 없다. 90점짜리 말 뒤에 70점짜리 행동이 따라붙는 게 문제다.
당신은 다음 미팅에서 그 말을 먼저 꺼낼 것인가. 아니면 여섯 달 뒤 두 화면이 나란히 떴을 때 상대가 찾아내게 둘 것인가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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